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레판토 해전 (문단 편집) == 그 외 이야기 == * 기독교 측은 당시에 유명한 해군 지휘관인 마르코안토니오 콜론나, 아스카니오 델라 코르나, 마르코 퀘리니, 마뤼탱 로메가스 등이 참전하였는데, 콜론나의 기함에 탑승한 로메가스를 제외하고는 이들 모두 각자의 배를 지휘했다. * 이슬람 측은 벡타시 무스타파, 델리 첼레비, 하지 아가, 코스 알리, 피알리 오스만, 카라 레이스 등 여러 명이 지휘관으로 참전했다. * 이 전투에는 [[돈키호테]]의 작가인 [[미겔 데 세르반테스]]가 참전했는데, 마르케사 호에 승선해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으면서도 보병 부대를 지휘했으며, 하사관인 마르틴 무뇨스도 시칠리아의 함선인 산조반니호에 탑승해 참전했지만 전투 당일에 열병을 앓았다. 다만 세르반테스의 경우, 왼팔에 총탄을 맞아 불수가 되는 바람에 '레판토의 외팔이(El Manco de Lepanto)'라는 별명이 생겼으며, 스페인으로 귀국 도중 해적들에게 습격을 당해 알제리에서 5년 동안 [[노예]] 생활을 했다. 이 외에, 돈세야 호의 페데리코 베누스타는 수류탄을 실수로 떨어뜨려 폭발하는 바람에 팔이 불구가 되면서 왼팔을 잘라 의수를 단 채로 전역하게 되었으며, 구호기사단의 기사인 로메가스는 몰타 섬의 갤리선들이 아닌 콜론나의 기함에서 승선한 덕분에 목숨을 건졌다. 그 당시 구호기사단의 부단장인 피에트로 주스티아니는 화살을 다섯 발이나 맞고도 살아남았다. * 영국 국왕인 [[헨리 8세]]의 서자일 가능성이 있는 해적이자 용병인 토머스 스투켈리가 에스파냐 함선 3척을 지휘하였으며, 파마구스타 공방전에서 사망한 베네치아 사령관인 마르칸토니오 브라가딘의 일가인 안토니오 브라가딘, 암브로조 브라가딘 등이 선두에 서서 갈리아스선 2척을 지휘했다. * 아내 살해 혐의로 12년간 갤리선에서 노예 생활을 한 피렌체의 음악가인 아우렐리오 셰티가 참전했으며, 총사령관 돈 후안의 기함에 애인을 따라 나선 마리아 라 바일라도라라는 여성이 [[남장]]을 하고 화승총병으로 참전했다. * 알리 파샤의 것으로 추정되는 오스만 해군의 깃발이 노획되어 베네치아의 해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었는데, 20세기에야 [[튀르키예]]의 요구를 받아들여 종교 간 화해의 상징으로 반환되었다. 흰 천에 금실로 [[쿠란]]의 경구를 자수한 군기라고 하는데, 현재 이스탄불 해양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고 추정되나, 패한 전투의 깃발이라 그런지 공개하고 있지 않다. [[시오노 나나미]]가 이를 두고 "그 깃발 멋있었는데 쓸데없는 짓을 해서 다시 못 보게 되었다"고 본인의 저서에서 불만을 표한 바 있다. 시오노는 어지간히 보고 싶었는지 이스탄불까지 가서 수소문했지만, 본인도 다시 보는 데에는 실패했다. * [[가톨릭 교회]]에서는 이 해전의 승전일인 매년 10월 7일을 '[[묵주기도]]의 복되신 [[성모 마리아|동정 마리아]] 기념일'로 지정하여 기리고 있다. 당시 교황 성 [[비오 5세]]가 신성동맹의 승리를 기원하며 수많은 가톨릭 신자들과 함께 묵주기도를 바쳤기 때문이며, 레판토 해전의 승리는 성모 마리아의 도움 덕분이라고 믿는다. * 이 전투 이후 오스만 해군은 이 전과 같은 정면 팽창보다 북아프리카의 신하국들을 이용한 [[해적]]질에 더 무게를 두게 되고, 2세기에 걸쳐 지중해를 뒤흔든 이 바르바리 해적들은 지중해 무역 자체를 불가능에 가깝게 만들어 버려 결국 이탈리아 도시국가들과 스페인의 경제적 몰락에 큰 일조를 한다. 문제는 오스만 제국의 자금줄 또한 지중해 무역에 적지 않게 의존하고 있었다는 점인데, 레판토 전투 이후 창궐한 이 해적들 때문에 전투의 참전 세력 대부분 큰 경제적 타격을 입었다는 걸 생각하면 역사의 아이러니 중 하나다. 그 후 바르바리 해적은 신생국 미국의 선박을 마구 약탈하다가 분노한 미해군과 해병대에게 1805년 [[1차 바르바리 전쟁]]에서 패배해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단순히 해적 함대를 섬멸한게 아니라 다시는 해적질 못하게 알제리, 튀니지 등의 해적 항구 등을 철저하게 박살내어 인프라를 아예 날려버렸다. 특히 이 항구의 민간인들도 미군에게 학살당했다.][* 미군 최초의 국외 원정이었으며, 스웨덴과 시칠리아 왕국이 미약하게나마 동맹으로 참전하여 전력을 보태었다.][* [[미합중국 해병대|미 해병대]]의 대표적 군가인 [[Marines' Hymn]][[https://youtu.be/SwS6OkgUXKE|#]]의 [[트리폴리]] 운운한 가사가 이를 의미하는 것.] 이후 프랑스가 알제리를 식민지함으로서 북아프리카 해적은 다시는 부활할 수 없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